2018년 경에 작성한 글.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는 2007년 한강이 집필하였고 2015년 영어판으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책이 세상 밖으로 나온 후 10년만인 2016년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하였다. 맨부커상 선정 위원회는 이 작품을 "불안하고 난감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 《채식주의자》는 현대 한국에 관한 소설이자 수치와 욕망,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갇힌 한 육체가 다른 갇힌 육체를 이해하려는 우리 모두의 불안정한 시도들에 관한 소설"이라 평가하기도 하였으며 서울을 배경으로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결심이 자신의 모든 존재를 지워버리게 되는 한 여성을 둘러싼 소설이다.
우선, 줄거리. 겉보기엔 평범하다 못해 무미건조하지만 고집이 세고 다른 이를 해치지 않으려는 성격인 '영혜' 는 마찬가지로 무미건조한 남자의 아내이다. 하지만 어느 날 영혜는 피가 뚝뚝 흐르는 생육을 먹는 끔찍한 꿈을 꾸게 되고, 고기를 아주 멀리하게 된다. 집에 있는 고기란 고기는 다 치우고, 남편에게는 "몸에서 고기 냄새가 난다" 며 잠자리를 거부하기도 한다. 영혜의 꿈은 점점 '고기를 먹는 것' 에서 떠나, 누군가가 누군가를 때려서 살해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보다 못한 남편이 그녀의 가족들을 불러 그녀에게 고기를 먹이려 하다 그녀가 자해를 하게 만들고 만다. 이 사건으로 가족은 풍비박산 나고 영혜는 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벤치에서 가슴을 드러낸 채 앉아 있다가 새를 잡아다 그 피를 핥아먹는 등 남편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결국 남편은 영혜를 버리고 만다(1부).
영혜의 형부는 미디어 아트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려는 예술가이다. 그는 아내가 자신의 동생(영혜)을 씻기다 그녀에게서 몽고반점을 봤다는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없는 흥분에 빠진다. 거부할 수 없는 욕구에 빠진 그는, 도덕적인 금기를 깨고 영혜를 불러 그녀의 누드에 꽃을 그려 촬영하고 싶다는 부탁을 한다. 영혜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간단하게 이를 수락한다. 영혜는 내심 식물적 삶을 갈망하고 있었다. 형부는 영혜의 몸에 꽃을 수놓고 어린 시절이 지나 사라졌어야 하는 게 당연한 몽고반점을 강조한 바디 페인팅을 그리며 성욕을 초월한 예술적 열망에 사로잡힌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완성시키기 위해 동업자인 남성 'J' 를 불러 모델 일을 부탁하고 그의 몸에도 꽃을 그려 영혜와 함께 찍도록 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영혜와 하나가 되는 모습을 촬영하겠다.” 는 그의 지나친 요구에 질색한 J는 촬영 중 스튜디오를 떠난다. 가뜩이나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했다.” 는 생각을 하던 주인공은, 결국 동업자에게 부탁해 자신의 몸에도 꽃을 그린 뒤 영혜와 몸을 섞게 된다. 열정으로 가득했던 하루를 보낸 주인공은 어느새 잠에 들었고 깨어보니 자신의 아내인 인혜가 있었다. 아내는 자신이 촬영한 영상을 이미 다 본 상황. 남편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아내는 남편에게 혐오감을 갖는다(2부).
영혜의 언니는 남편과 결별한 이후, 영혜가 비 내리는 숲의 한 가운데서 며칠이고 가만히 서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혜를 찾아간다.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언니는 영혜를 보기 위해 그곳으로 간다. 영혜는 비쩍 마른 몰골로 물구나무서기를 한 채 언니의 부름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러다간 정말 죽는다고 영혜를 말리며 호소하는 언니를 두고 그녀는 발악에 가까운 반발을 한다. 영혜는 이제 육식을 거부함 뿐 아니라 음식 자체를 거부하며 햇빛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며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을 나무로서 여기면서 그 어떤 음식물의 섭취도 거부한다(3부).
1,2,3 부의 제목은 각각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다.
다름에 대한 폭력과 사회적 타부
영혜는 여러 이유로 독특한 사람이다. 우선 그녀는 갑갑하다는 이유로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다. 영혜의 무난함에 매력을 느껴 결혼을 한 남편조차도 영혜의 노브라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주변인들의 시선도 별반 차이가 없다. 그들은 그녀에게 호기심을 가지거나 경멸한다. 사람들은 영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게다가 그녀는 고기를 거부하는 채식주의자이다. 남편 회사의 간부는 영혜의 채식을 “수렵생활 때부터 내려온 인간의 본성을 거부하는 행위”라고 한다. 그저 고기를 안 먹는 행위로 인해 영혜는 본성을 거부하는 여자가 된다.
채식주의를 정신병처럼 여기는 가족은 그녀를 결박하여 억지로 고기를 먹이고, 이를 거부하는 영혜는 손목에 자해를 한다. 모든 갈등이 고기를 더 이상 먹지 않겠다는 영혜의 선언 한 가지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생각하면 영혜에 대한 다수의 시선과 간섭, 그 뒤 따르는 그들의 폭력은 섬뜩할 정도다.
모두가 강요하듯 영혜가 다시 고기를 먹기로 결정했다면 그녀의 바뀐 삶은 그들의 말처럼 옮은 것인가? 그리고 영혜는 그제야 한 인격으로서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인가? 명목적으로 부여된 개인의 선택과 선언은 어디에서 존중받을 수 있을까? 모두가 영혜를 걱정하지만 영혜가 갈등을 빚으면서까지 왜 채식주의자가 되기를 고집하는지 알려는 사람은 없다.
‘몽고반점’에서 제시하는 사회적 타부는 가족이다. 영혜와 형부는 피를 나눈 혈족은 아니지만 처제와 형부는 계약을 통해 만들어진 친인척 관계이며 가족이다. 가족 간의 섹스는 사회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작가는 2부를 통해 당연해 보이는 가족 간의 섹스에 대해 의문을 제시한다. 섹스를 통한 가족의 정서적 교감은 공감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두 사람을 통해 작가는 가족의 해체를 보여준다.
사회적 타부의 끝은 어디일까? 누군가 자살을 결심한다면 주위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그 사람을 막을 것이다. ‘죽음은 좋지 않다는 것’은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받아들이는 진리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살아야 한다는 것’ 또한 뒤집어 보아야 할 것이었나 보다. 3부에서 작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2부의 사건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한 영혜는 음식 자체를 거부하고 이해할 수 없는 소리만 한다.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영혜는 심지어 스스로 죽음을 준비한다. 인혜는 “그러다가 죽어”라고 염려하지만 영혜는 “죽으면 안돼?”라고 태연하게 답한다. 지금껏 어떻게든 살려고 아등바등했던 인혜는 죽음으로 나아가는 동생 영혜가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지만, 끝내 피를 나눈 영혜를 보며 알 수 없는 공감을 느낀다(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 비로소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역설인가?). 때로는 폭력에 침묵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온 인혜에게 있어 죽음으로 나아가는 동생 영혜는 오히려 인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삶이란 무엇일까? ‘당연히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폭력
소설 ‘채식주의자’에는 총 세 명의 여성이 존재한다.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 ‘영혜’, 그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여성 ‘인혜’, 그것을 폭로하는 여성 ‘한강’이다.
‘채식주의자’속의 폭력은 모두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다. 최초의 폭력은 영혜가 가부장적인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는 순간이다. 그 이후로 영혜는 시종일관 폭력의 대상이 된다. 아버지에게 맞고 남편에게는 강간당하며 형부의 관음증적 시선으로 평가받고 정신병원에서는 의사들이 원하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입속으로 밀어 넣는다.
하지만 영혜는 저항한다.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저항의 방식은 육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영혜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폭력을 상징하는 육식을 거부하며 소설의 말미에는 음식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녀는 나무가 돼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폭력을 끝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라는 영혜의 대사는 그녀의 비폭력 지향적 태도가 드러난다. ‘왜 죽으면 안 되냐’는 질문 또한 폭력에서 완전히 해방된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인 것 같다.
인혜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영혜에게 가해지는 폭력만큼 표면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녀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그녀 역시 남편에게 강간당하고 제부의 관음증적 시선에 평가받았으며 남편이 저지르는 불륜을 눈앞에서 목격해야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다. 또한 그녀는 1부, 2부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지 못했으며 두 남자가 사라진 3부에서도 ‘그녀’로 불리며 관찰자의 시점에서 그려졌다.
하지만 그녀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또 다른 여성인 영혜를 관찰하며 자신의 처지(진실)를 파악해 간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 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라는 대목에서 그녀가 스스로의 처지를 깨닫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저항방식은 영혜와는 많이 다르다.
그녀는 폭력에 온몸으로 폭력에 저항하기보다는 영혜에게 공감한다. 또한 영혜가 겪은 고통에 대신 괴로워하며 자신을 돌아본다. 폭력에 파괴당하고 저항하는 여성을 관찰하는 여성은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들의 화합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인혜는 영혜가 지향하는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영혜는 인혜와의 소통 가능성을 믿지 못했다. 둘은 결국 각자 파멸의 길을 걸었고 둘 모두 삶에서 폭력의 뿌리를 뽑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했다.
한강은 소설에서 부당함을 폭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저항을 그려냈지만 소설속의 여성 모두 그것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으며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그 부분에서 소설에 좌절감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수 없이 좌절해온 현실 속 여성들의 모습을 가장 사실적으로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폭력의 재생산
한강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다루었지만 그 스스로도 소설 속에서 폭력을 재생산했다고 생각한다. 우선 1부, 2부에서 각각 남편, 형부의 시선에서 영혜와 인혜는 탐닉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혜와 인혜의 몸은 남성화자의 시선에서 지나치게 묘사된다. 소설 속 남성의 비정상적인 욕구를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여 읽는 독자로 하여금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의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도를 떠나 한강은 표현을 위해 여성을 또 다시 성적 대상화 한 것이다. 또한 영혜는 남편과 형부만이 아닌 여러 시선에 의해 비추어진다. 끝내 독자의 시선에 까지 영혜의 몸은 파헤쳐진다. 소설 속의 영혜는 그저 관찰의 대상이자 관음의 대상이다.
두 번째 폭력의 재생산은 2부 ‘몽고반점’에서 드러난다. 영혜는 형부에 의해 자신의 몸에 꽃이 그려지고 그런 자신을 촬영하며 악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섹스를 식물간의 조화라고 받아들이며 그 행위에 욕망을 느끼기까지 한다. 형부와의 섹스는 마치 영혜를 정화시켜주고 치유해주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영혜가 정화되는데 형부의 손이 개입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그 수단이 섹스여야만 했을까? 영혜 스스로 꽃을 그리는 등 그 방식을 스스로 찾아갈 수는 없었던 것인가. 영혜는 인혜에 비해 그나마 주체적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인데 결국은 자신을 정화하고 찾아나가는 과정, 그 과정을 홀로 할 수는 없었고 그것은 형부의 또 다른 ‘폭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시, 채식주의자
우리는 ‘채식주의자’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가해지는 폭력을 목격했고 그것이 여성을 향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광주민중항쟁에서 죽어간 중음신(中陰身)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김응교,2016). 영혜, 인혜, 한강까지 소설 속의 세 명의 여성, 그들은 과거 한국을 살아간 많은 여성들의 상징이며 ‘채식주의자’ 또한 그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